바늘로 찌르듯 설파하는 욕망과 권력의 허실

밀로시 포르만 감독의 ‘고야의 유령’(2006)

● 고야의 초상화에서 착안한 비극적 이야기
● 부패한 종교와 ‘해방군’ 프랑스군의 이중성
● ‘가상’의 로렌조와 이네스 쫓는 ‘실존 인물’ 고야
● 인간 탐욕서 나온 공포정치, 구원자는 누구?
● 권력 독점과 사투르누스에서 찾는 민주주의

 

로렌조 신부의 초상화 앞에서 고야가 생각에 잠겨 있는 영화 속 장면. [네이버영화]

로렌조 신부의 초상화 앞에서 고야가 생각에 잠겨 있는 영화 속 장면. [네이버영화]

18세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권력과 욕망의 덧없음을 과감한 터치로 표현한 화가였다. 민중을 탄압하는 부패한 종교를 풍자하고 성직자를 악마로 묘사한 그의 에칭 판화는 거센 논란을 불렀다.

눈이 튀어나올 거 같은 사투르누스가 아들 머리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그림(‘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도 프랑스의 식민 지배와 독립전쟁으로 피폐해진 야만의 시대에 그린 작품이다. 늘 ‘어린 양들’을 보호해 줄 것 같은 종교도, ‘자유·평등·박애’로 포장한 프랑스군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름 높은 궁정화가 고야는 알았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든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불평등과 부정의를 낳는다. 권력이 특정 소수에게 집중되면 특정 소수는 대중의 정치참여를 제한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권력의 분산, 즉 일반 대중의 정치참여와 권력 견제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요구되는 필요조건이다.

영화 ‘고야의 유령’을 다시 보면서 고야는 어쩌면 자신이 살았던 18세기에 권력을 독점한 특정 소수집단(무능한 왕족과 부패한 성직자)을 그림으로 풍자하며 해방군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해방군 역시 또 다른 부패한 성직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식의 머리를 씹어 먹는 사투르누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과 스페인에서 동시 개봉된 2006년에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08년 예술영화관에 잠깐 걸렸더랬다. 영화를 연출한 밀로시 포르만(1932~2018) 감독은 고야와 신부 로렌조, 로렌조가 겁탈한 여인 이네스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권력의 허실을 바늘로 찌르듯 전하고 있다. 교살된 로렌조의 시신이 실린 수레를 따라가는 유일한 이가 이네스라는 엔딩 장면에서는 누가 우리의 구원자인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슈는 이슈로 덮는다…부활한 마녀사냥포르만 감독은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고야의 ‘프란시스카 사바사 이 가르시아의 초상’이란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의 스토리를 착안한다. 사실 고야는 여성의 모습을 이렇게 청초하게 그린 적이 없다. 원래 이 초상화는 1804년 그리기 시작해 1808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감독은 시대 배경을 12년 앞당겨 1792년으로 설정한다. 동시에 이 초상화에서 마드리드의 부유한 상인의 막내딸이 겪는 비극적 이야기를 새로이 창작한다.

영화는 1792년 마드리드 종교재판소에서 시작한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스페인 성직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판화를 바라본다. 이 중차대한 시기에 스페인 전역은 물론 유럽과 멕시코까지 ‘불경스러운’ 그림을 판매한 불경한 화가 고야(스텔란 스카스가드)를 어떻게 단죄할지 고민한다.

절대 권력 유일신에 반기를 든 궁정화가 고야는 스페인 최고 예술가로 왕실의 든든한 비호를 받고 있다. 이미 18세기 중엽부터 유럽 전역에서는 전통적 편견에 반기를 들고 인권과 자유를 부르짖는 계몽주의의 불씨가 퍼진 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엔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종교적 권위도 속수무책 추락하고 있었다.

심각한 성직자들 사이에서 고야와 친분이 있던 신부 로렌조(하비에르 바르뎀)가 나선다. 그는 “고야가 판화에서 비난하는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탈을 쓴 이교도 악마’”라는 황당한 논리로 고야를 감싼다. 그러면서 지난 50년 동안 화형을 시킨 이단자는 고작 8명이었으므로 이단자를 엄격하게 검열해야 한다고 열변한다. 이에 교회는 이단자를 잡아들이기 위해 시민을 감시할 세작들을 조직적으로 심는다.

고야는 부유한 상인의 막내딸인 이네스 빌바투아(내털리 포트먼)의 초상화를 그린다. 맑고 아름다운 이네스는 고야에게는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바라보기만 해도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다. 어느 날 이네스는 오빠들과 식당에 가서 돼지고기 냄새가 싫다며 닭고기를 먹는다. 이를 유심히 지켜본 세작은 이를 상부에 보고한다. 단지 돼지고기를 안 먹었을 뿐인데 그녀는 이슬람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종교재판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지금은 누구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이네스와 가족이지만 선대는 유대교도였다. 이네스의 고문 과정에서 선대가 유대교도였다는 걸 알게 된 교회는 이보다 확실한 이교도의 증좌는 없다고 믿는다.

‘무오류’ 종교재판소의 만행

종교재판소 감옥에서 로렌조 신부에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는 이네스. [네이버영화]

종교재판소 감옥에서 로렌조 신부에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는 이네스. [네이버영화]

종교재판소는 ‘신앙 테스트’라는 명목하에 예전 마녀사냥 재판을 재개한다. 심판관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일삼으며 “죄가 없다면 이 고통을 이겨낼 것이다”라며 읊조린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에게 자백은 시간문제다. 자백을 하면 재판에 넘겨지고 자백을 근거로 화형 혹은 무기징역에 처해져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하는 ‘재판소’는 존엄성을 훼손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생전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 속에 이네스는 뭔지도 모르는 유대 교리를 따랐다는 죄를 자백하고 재판을 앞두고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네스를 구하기 위해 고야는 로렌조에게 그녀의 구명을 부탁하고, 로렌조는 감옥을 찾아 이네스를 만나지만 순간의 욕정에 그녀를 겁탈한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아버지는 고야의 소개로 로렌조를 만나 수도원 재건을 위한 거액의 기부금까지 쾌척하며 딸을 살리려 처절하게 간청한다. 한데 로렌조는 “신앙이 견고하면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기에 거짓 자백은 못 한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격분한 이네스의 아버지는 로렌조를 허공에 매달아 직접 고문한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로렌조는 종교재판소 강제 심문에 대한 고해 문서를 쓴다. 이는 이네스를 고문해 강제로 자백을 받았다고 시인한 셈이 된다.

로렌조도 이네스를 변호하려 하지만 종교재판소는 ‘무오류’의 신성한 기관이어야 했다. 오류를 절대 인정하지는 않는 종교재판소의 고위 성직자들은 이네스 아버지의 돈만 챙기고 간청은 묵살한다. 이후 로렌조가 이네스 아버지에게 써준 문서가 알려지면서 교회는 웃음거리가 되고, 로렌조 역시 종교재판소에 회부돼 화형을 선고받는다. 엄격한 이교도 화형을 주장한 로렌조 자신이 화형을 당하는 기막힌 현실이 벌어진 것이다.

그즈음 로렌조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종교재판소는 대신 고야가 그린 로렌조의 초상화를 화형시킨다. 바야흐로 눈과 귀를 막는 억압과 음지의 폭력이 난무한 공포정치가 시작되지만 신성한 종교의 이름 앞에선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공포 사라지자 등장한 ‘보이는 공포’전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만든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는 압정에 신음하는 스페인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1807년 스페인을 침공한다. 그리고는 군수물자를 현지에서 조달하는 나폴레옹 군대의 특성상 마구잡이 약탈을 강행한다. 고야는 그사이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지만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던 그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잔악한 참상을 화폭에 담는다. 스페인인에게 혁명의 이상을 구현한다는 나폴레옹은 세상을 현혹시킨 시대의 재앙이 됐다.

 

영화에서 종교재판소를 강제로 폐쇄하는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네이버영화]

영화에서 종교재판소를 강제로 폐쇄하는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네이버영화]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을 스페인 국왕으로 앉히고는 종교재판소를 폐쇄한다. 이로 인해 이네스도 15년 만에 감옥 밖으로 나오지만 가족은 모두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재산도 몰수당해 이네스는 오갈 데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된다. 그녀는 고야의 집을 찾아 필담으로 로렌조와의 만남에서 딸의 출산까지 모두 고백한다.

고야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이네스의 처참한 행색과 믿을 수 없는 종교재판소의 악행에 아연실색한다. 그러고는 이내 이네스의 딸을 찾기 위해 종교재판소 재판법정을 찾는다. 그곳에는 스페인 성직자들이 프랑스군의 재판을 받고 있다.

프랑스군이 내세운 특별검사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은 불가항력이며 완벽하고 정당하다”며 대혁명을 강변한다. 주어만 바꾸면 얼마 전까지 스페인 성직자들이 하던 이야기다. 그런데 특별검사가 다름 아닌 로렌조였다. 그는 “모든 인간은 위대하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자는 자비 없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선동한다.

종교재판에 처해지자 도망자 신세가 된 그는 프랑스로 넘어가 혁명 세력에 합류한 뒤 마드리드에 금의환향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세 아이를 둔 가장으로 골수 나폴레옹주의자가 됐다. 고야는 이네스의 사정을 전하지만 로렌조는 태연하게도 오랜 수감 생활로 정신이 온전치 못해 치료가 필요하다며 이네스를 데려간다. 결국 로렌조는 이네스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태어나자마자 수도원에 맡겨진 그의 딸 알레시아(내털리 포트먼 1인 2역)를 찾는다.

누가 우리의 구원자인가로렌조는 ‘거리의 여자’로 거칠게 살아가는 알레시아를 미국으로 보내 영원히 비밀을 덮으려 하지만, 미심쩍었던 고야는 정신병원에서 이네스를 찾아내 모녀를 상봉시키려 한다. 그러나 로렌조의 사주를 받고 급습한 군대가 성매매업자들을 체포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사이 스페인으로 진격하는 영국 군대와 합심한 성난 스페인 국민들이 침략자를 처단하러 마드리드로 향한다. 영국군에 속수무책 당하는 프랑스군은 퇴각하기 바쁘다. 프랑스 군대에 의해 감옥에 갇혀 목숨을 구걸하던 스페인의 고위 성직자들은 모두 풀려나 다시 과거의 위엄을 되찾고, 로렌조는 줄행랑을 치다가 붙잡힌다.

결국 로렌조는 종교재판소에 다시 넘겨져 이네스와 고야, 딸 알레시아를 비롯한 많은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에 처해진다. 로렌조의 시신이 실린 수레를 이네스가 따라가는 마지막 장면은 누가 구원자인지에 대해 묻고 있다. 프랑스 혁명군으로 인해 부패한 성직자들의 탄압에서 벗어나는가 싶었지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창한 인본주의로 포장한 혁명군 또한 상대의 입장에서는 자유를 꺾고 평등을 억누르고 박애를 밟는 점령군일 뿐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숭고한 열망에서 출발한 인간도 권좌에 오르면 탐욕에 휩싸여 변질되기 마련이다. 영화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남을 배척하는 인간의 속살을 담담하게 그린다. 그 과정에서 생긴 과오를 덮기 위해 상대의 자유를 탄압하니 이게 바로 공포정치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고 공산 정권에서 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노장 감독 밀로시 포르만은 ‘고야의 유령’을 통해 자유를 억압하는 공포에 대한 엄중한 경고장을 날린다. 이 영화는 그가 생전 마지막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기도 하다.